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구도는 성종에서 연산군, 그리고 중종에 이르는 시기에 집중 부각된다. 그리고 명종 대를 마지막으로 훈구는 사라지고 사림이 주도권을 잡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훈구세력들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세조(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기점으로 세조를 지지하
사림파는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도를 싣는 것이 문의 사명이고 문이 그 자체로 평가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 재도(載道)의 노선을 택해 전에 없던 새로운 문학을 해야 한다고 했다.
, 문학을 하는 기풍 그 자체로서도 대립적인 양상을 드러냈다. 관인문학은 문학의 장식적인 기능을 중요시하고 격식에 Ǜ
한국시가문학의 중심지가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정치적 패배세력의 유배지로서의 역할이다. 정치적 바람을 맞은 학문과 지식이 높은 유배자들이 남도에 부처 되어 살았다. 가족과 멀리 떨어진 그들은 착잡한 삶과 감정을 여러 형태의 시가로 표출하여 아름다운 정서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남도는 한반
훈구파가 사림을 탄핵하기 위한 노력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이에 성공하여 사림이 큰 화를 입은 것이 조선사를 통틀어 크게 4번이 있는데 이를 사림의 화, 줄여서 사화라고 한다. 4대 사화는 아래와 같다.
<표 2 - 4대 사화의 원인과 전개>
사화명
주축세력
피해세력
발단
결과
대립구도
무
훈구파와 맞서기 시작했다.
김종직은 도학에 힘쓰지 않고 적극적인 진출을 꾀했다. 기존 세력에 꿇리지 않는 역량을 가져, 관이문학에 맞서는 사림문학의 노선을 마련하였다. 김종직은 ‘방달’이라고 일컬어지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작풍을 개척했다. 그렇게 해서 표현의 수준이나 언어 구사에서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