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그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재능과 품격은 비길 데 없이 탁월했지만, 관리로서의 생애는 상당히 불행했다. 44세에는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키며 서울로 호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고 한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었다.
당송팔대가를 얘기할 때, 쉽게 흘러나오는 이름이 소식, 소순, 소철일 것인데, 이들은 무슨 친척이 아니냐고 우리나라 사람이면 당연히 생각할 것이다. 아는 이가 많겠지만, 소순은 소식, 소철의 아버지이고, 소식은 소철의 형이다. 아버지인 소순은 대중상부 2년에 탄생해 후에 친교를 맺은 구양수,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