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수교를 거부함으로써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초래했고, 서양문화의 수용이 늦어지게 되었다. 결국 민비와 유림 등의 반대 세력에 의해 실각하게 되었다.
3.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실시하게 된 경위
-조선 말기에 이르러 유입된 천주교가 기존의 주자학의 신념체계를 흔들어 놓았고 이러한 사
왔으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조선에까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이양선이 자주 출몰)
미국의 셔먼호가 대동강을 오르내리며 침략을 도발한 이후, 프랑스의 천주교도 박해를 이유로 한 병인양요 등 수 차례의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된다. 이들은 이러한 전쟁을 빌미로 통상을 요구했고, 그것이 쇄국
간여하였고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그는 입궐하여 왕명으로 사태수습을 위임받고 출분한 민비의 사망을 공포하고 재집권하였다. 그러나 청국의 개입으로 청국으로 연행되어 3년간의 유수생활을 겪어야 하였다. 1885년 2월에 조선통상사무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위안스카이와 같이 귀국한후에도 권
변질되어 버리자, 척사론 자들은 지배층을 중심으로 국론을 통일하여 소중화의 문물을 지키고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전통적 가치질서를 보존해 가고자 하는 데 그 근본적인 목표를 두었다. 그리고 1871년 흥선대원군은 1866년에 이미 지어 놓은 척화비를 전국의 고을에 세우게 하였다.
강화 및 국권 융성을 꾀한 개혁가'라는 평이 엇갈린다. 시대착오론자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에 줄기차고 거세게 저항했던 흥선대원군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식민사관의 유산이라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병인박해의 피해를 입은 한국 천주교회, 안동 김씨, 여흥 민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