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 가마는 전라도 강진, 부안외에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충남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등지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양질
청자에 비해 인천시 북구 경서동과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는 '녹청자'로 불리는 거친
청자도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통일 신라시대의토기 바탕흙을
고려청자의 비색은 천하제일’이라고 할 만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만의 독창적인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당시 귀족 중심의 불교국가인 고려시대의 영향을 받은 청자는 그 화려함과 세련됨으로 많은 걸작을 남기고 고려시대 후기를 정점으로 점차 사라져 가게 된다.
세계 도자기의 발전을
고려청자의 기술이 우리의 독자적인 기술이었다고 주장하는 설(5)주석: 조선기술발전사3 고려편 과학백과사전 종합출판사, 북한,1994.도 있는데 그 이유로 고려청자와 중국청자의 기술공정상차이(6)와 함께 오래전부터 도자기 제작에 있어서 많은 축적된 기술의 모습이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의 형태지만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어 왕권이 불안정하고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하였으나 장보고(828-846)를 비롯한 신라인들이 해상세력을 장악하여 삼국간의 문물교류와 사무역(私貿易)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중국 당(唐)나라의 진보된 도자기 제작기술이 통일신라시대에 전래되어 청자뿐 아
신라 말 토기에서 청자로 발전하는 전환기를 맞게 된다. 신라시대에는 금속기와 토기가 널리 사용되었으나, 왕족과 귀족들의 최고의 공예품은 금으로 만든 여러 장신구였다. 이에 비해 고려시대에는 청자와 백자 등의 도자기가 만들어져서 왕실과 개경을 중심으로 살던 중앙 귀족이 애용하였다.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