것이지 깨달음의 길이 닫혀 있다고 본 것은 아니다. 여성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세간의 최고지위인 왕위에도 오르거나 통치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사서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여왕이 여성 리더로 자리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유교와 달리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상정하는 여성성불론으로도 선덕여왕에게 영향을 주었다. 조경철, 「신라의 여왕과 여성성불론」, 한국역사연구회, 2009, pp.127~152.
또한 당시 진평왕은 아들이
신라 백성들은 적잖이 기뻐했을 것이다. 여왕의 즉위로 빚어질 사태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을 텐데, 이러한 조치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여성성불론과 선덕여왕
한반도의 역사에서 여왕의 등극은 유독 신라에서만 존재하였다. 신라의 여왕은 선덕
- 왕은 배필은 위홍 대각간이다
《삼국유사의 기록》
신라 시대 때에는 근친에 대한 금기가 심하지 않았다. 김유신 장군과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처남 매제간이면서 사위 장인(김춘추의 둘째 딸이 김유신의 처)인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선덕과 진성여왕 사이에 사회의 풍
신라인의 노래는 이러한 불교에 기반하여 생성된 것 이였고, 그 이래로 불교사상은 수많은 문학작가들이 문학을 창조하는 원천이 되었다.
고대 시가는 물론 일찍이 신라 향가에 와서 불교 시가 많이 창작이 되었고, 수업시간에 배웠던 월명사의 제망매가, 충담사의 찬기파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