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사회신분제 개혁의 목표는 나라의 부강과 인재의 광범위한 등용, 그리고 하위신분층의 불만 해결을 통한 사회발전이었다.
정약용은 당시의 사회신분을 양반,중인,양인,천인의 네 신분으로 구별했고, 이를 더 자세하게 나누어 양반과 중인 사이에 '향(鄕)'을 설정하고, 양인과 천인 사이에 신
조선왕조는 사회주의와 간섭주의가 혼합된 경제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간섭주의가 길어지면 사회주의가 된다는 점도 왕조 경제제도를 규정할 때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선왕조는 신분제를 기초로 한 왕조 사회주의 국가였다고 규정하거나 신분제 때문에 자본주의 이전 사회였다고 규정할
사회의 중심세력이 된 것은 수도에 사는 왕경인(王京人)이었다. 나아가 왕경인 중에서도 신분제에 의하여 특권이 부여된 귀족들, 그 중에서도 왕족과 왕비족이 주로 정치․경제․문화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매우 제한된 소수의 귀족가문이 사회적인 지배세력을 형성하고 있
사회신분제의 동요 과정에서 향촌 내 지배력의 행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소외계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족출신인 갑산민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일반 농민의 처지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갑민가>는 조선 후기 변방지역의 사회신분제의 극심한 혼란과 변화를 배경으로
별주부전이 쓰인 조선후기(17~18세기)에도 이와 같은 문제가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조선은 신분제사회다. 신분에 따라 각자 해야 할 역할과 본분이 있다. 자신의 신분 내에서 해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다른 신분을 침범하는 행위가 발생하면 강하게 처벌했다. 예를 들면 아랫사람인 평민들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