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항복으로 마침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쟁 기간 동안, 즉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헤게모니가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에 의해 도전받고 해체되는 동안,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전쟁과 그 전쟁을 부추긴 세력에 대한 비판을 그의 작품 속에 반영시켰다. BC 41
작품은 로마의 번안극을 통하여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신희극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연애 이야기를 다루는데, 여기에 고안된 희극적 상황은 오래 계승되며 소재로서 서양의 희극사를 풍요롭게 하였다. 그러나 합창대는 점차 정치적 의미를 잃고 연극 내용과 관계없는 막간음악의 담당
아테네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가 최초의 희극 작품을 발표했을 때는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후였다.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와 그 시대의 잔여물을 통해 민주정의 절정기에 달했었고 그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적 정책을 통해 그리스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
작가로서, 그에게 제우스신은 정의를 대표하는 최고의 신이었다. 인간의 교만은 죄를 부르고 죄에는 필연적으로 벌이 따르므로, 벌은 정의의 나타남인 것이다. 제우스신은 그 벌을 맡는 복수의 여신들(에리뉘스들)을 조정하여 준다. 이 조정은 곧 구원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이 3부작의 형식을 갖는
테아트론(theatron), 원형에서 나중에 반원형으로 줄어든 합창대용 오케스트라(orchestra), 배우가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스케네(skene: 무대)가 그리스 극장의 기반이자 외형상의 틀이다. 애초부터 비극에는 늘 '사티로스 극' 1편이 이어졌는데, 이로부터 발전하여 훗날 희극이 고유의 예술장르로 정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