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대한 비판이 극히 날카로웠으나, 사회적 모순은 대체로 추상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759년 어머니가, 1760년에 할아버지가, 1767년에는 아버지가 별세했다. 아버지의 장지(葬地) 문제로 한 관리가 사직한 것을 알고는, 본의 아니게 남의 장래를 막아버린 것을 자책해 스스로 과거에의 뜻을 끊었
2. 작가에 대한 고찰 ----(2)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朴趾源,1737 ~ 1805)
박지원은 1737년 한성 서쪽 반송방의 야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와 고관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5대조 박미는 문예 서도의 대가로서 선조의 부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의 지돈녕부사를
연암 박지원의 사상
1. 寫實 主義(사실 주의)
연암은, 문장이란 누구든지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억지로 옛 사람이 쓴 고어를 생각하고 고전의 經旨(경지)를 찾으며 근엄하게 글뜻을 장중하게 꾸미려는 것은 마치 화공이 그림을 그릴
당시의 국내정세는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아 벽파(僻派)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어 결국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화가 연암으로 불려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이곳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연암 골짜기에 들어가 머물면서『열하일기』25편을 저술했다. 이 작품은 랴오둥[遼東]·러허[熱河]·베이징[北京] 등지를 지나는 동안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도움이 되는 청나라의 실제적인 생활과 기술을 눈여겨 본 것의 내용을 담았고, 청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당시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