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부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물론 일부에서 부등변팔각형의 평면을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특히 옥개석에 표현된 기와골, 내림마루, 암·수막새기와, 겹처마 등의 목조건축의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같은 양식의 부도와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
대한 정비를 단행하여 새로운 주를 제정하였는데, 광주(廣州) · 충주 · 원주 · 청주 · 공주 · 상주 · 양주 · 전주 · 광주(光州) · 춘주 · 명주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9주 5소경 지역으로 명실상부한 대읍이었다. 이 조치에 의하여 종전의 웅주가 공주로 명칭이 바뀌어 드디어 공주
명종 때 義賊으로 불린 林巨正이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林巨正은 재능과 학식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賤民신분의 백정이라는 것 때문에 官職에 오르지 못하였다. 林巨正은 이러한 時代의 부조리에 항거하기 위해 '大賊團'을 조직하고 이곳 鐵原을 근거지로 삼아 성곽을 쌓고 朝廷에 대항하였다.
방지라는 이유로 전실에 목조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석불 보호 차원에서 유리창이 쳐졌다. 일제시대부터의 이런 일련의 조치는 모두 석굴에 해(害)만 끼쳐 현재 석굴은 에어컨의 진동과 소음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석종교와 예술, 과학이 최고의 조화를 이룬 석굴에 대한 진지한 연
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Buddha-dhyana-Samadhisagara-Sutra)은 A.D. 317년에서 420년 사이 중국 동진에서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에 의하여 번역된 경으로 모두 10권 12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제5품 관사무량심품(觀四無量心品)은 자비희사의 불심을 설명한 것이고, 관사위의품(觀四威儀品)은 부모를 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