않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래서 왕실에서 베푸는 각종 불교 행사에는 참가하지도 못하는 수모를 당하였으나, 원효의 마음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결국 난해한 책으로 알려진 금강삼매경에 대한 疏를 짓고, 그 강의를 위해서 다시 중앙의 불교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불교사상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원효보살 또는 원효성자라는 존칭을 썼다.
원효불기조에 의하면, 원효는 태어나면서 총명하고 뛰어나서 스승을 따라 배우지는 않았다고 하며, 출가이후로는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에 있다가 고구려가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자 백제의 고달산으로 피신해 있던 보덕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며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원효는「대승기신론」을 대하자마자 스스로의 삶과 학문의 목표와 너무나 맞아떨어짐에 감명을 받아 기존의 논의에관한 9종의 연구서를 내 놓았다. 그 가운데서 4권(「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2권)이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사상의 지양․종합이라고 판석하고 있다. 즉, <<기신론>>은 마음의 청정한 면만을 주로 찬탄하고 강조해 온 중관사상과 마음의 染沔한 면을 주로 밝혀 온 유식사상이 잘 조화를 이루어 眞俗不二의 불타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본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해석은 <<기신론>> 출현의 시기에 인도 불교사상
원효의 저술 중 대승기신론소・별기 와 금강삼매경론 은 특히 철학 부분에서 신라정신과 종교적 이념을 담고 있어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연구하는 데 지금까지 불교연구에 근간을 이뤄 오고 있다.
특히 대승기신론소는 2세기 인도의 고승 마명대사가 지은 대승불교의 고전 「대승기신론」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