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밖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과 자신의 신앙을 조화롭게 해석할 수 있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존중되던 가치 충효였고 하느님을 대군부로 섬기는 충효의 영성을 실천하였다. 그런데 당시 집권층에서는 천주교를 불충불효의 종교로 규정, 무부무군(無父無君)이라 매도하였다. 이에 대한 대항논리는 그
역사적 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당시 식민사관과 일제 어용학자들은 조선은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논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조선 당쟁의 역사를 이용했다. 그들에 의하면 당쟁의 모든 원인은 개인간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를 추악한 양상으로 묘사
사건을 평가하는 데에 굉장히 야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당시에 4·3 사건은 하나의 치욕적이면서도 회피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어떠한 공식적인 언급도 50년대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60년대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단순히 여론의 변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즉 4·19 혁명을 통
오늘날 정부가 추진하는 국책사업은 과거에 비해 많은 갈등과 분쟁을 겪고 있다. 사업 착공에서부터 문제가 제기되는 것뿐만 아니라, 착공 후 완공을 하지 못하고 중단되기도 하며, 중단되었다가도 사업이 강행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사회가 민주화 · 분권화, 사회구조의 다양화 · 복잡화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은 왕권의 심각한 약화와 당쟁의 이념전쟁화를 불러왔다. 특히 정조는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나뉘는 노론의 이분법적인 붕당관 때문에 인재가 버려지는 경우가 생기고 극심한 당쟁으로 인해서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풍토가 생기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때문에 정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