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와 시가를 즐기거나 정권을 멀리하여 청담의 풍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동환은 현실도피 그룹으로 보아온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를 수정하여 반항성을 띤 그룹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라도 도피성을 띤 단체라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첫째, 입신행도의 유교사상
본관 황려(黃驪:驪興).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 인저(仁氐).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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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 이들이 등장한 이유는?
명제가 죽은 지 19년 뒤인 정시(政始) 10년(249)에 위나라의 군사 실력자인 사마의는 중신들 사이의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실권을 장학하기에 이른다. 사마염(司馬炎:236~290/사마의손주)은 주도면밀하고 잔인하게 적대 세력을 말살하면서 위 왕조 찬탈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유영은 낙양의 어느 주점에서 뚜캉주 석잔을 연거푸 마시고 만취하여 집앞에서 쓰러졌다. 가족들은 그가 죽은줄 알고 장례를 치르고 공동묘지에 묻었다. 3년 뒤 술 값을 받으러 온 술집 주인은 깜짝 놀라며 묘지에 달려가서 그의 묘를 파보니 유령은 기지개, ‘한잠 잘 잤다.’하
죽림칠현을 본떠 죽림고회를 결성한 것도 그 불만을 드러내는 우회적 포즈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죽림칠현 실제로 죽림칠현은 술만 마시고 청담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으나 결국 세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죽림칠현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