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작가] 이인로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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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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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죽림의 냉소

1) 李仁老 (1152(의종 6년)∼1220(고종 7년))

2) 강좌칠현(江左七賢)

2. 문벌 귀족 vs 신흥사대부

1) 광객의 풍자 이규보

2) 용사 vs 신의

3. 이인로의 문학

1).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

2) 시 세계


본문내용
2) 강좌칠현(江左七賢)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가 그 일곱인데, 나이로 보면 오세재가 장이었고 이인로는 이들의 대변인 격이었다. 이들은 모두 고려사와 분수령이 된 무신난으로 몰락한 옛 문신귀족의 후예들로 ‘무부(武夫)’들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단한 불만을 품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진나라의 죽림칠현을 본떠 죽림고회를 결성한 것도 그 불만을 드러내는 우회적 포즈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죽림칠현 실제로 죽림칠현은 술만 마시고 청담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으나 결국 세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죽림칠현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이 대처하던 전통적 방식, 즉 역사와 노동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자연과 은일의 세계로 물러나는 태도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러했듯이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의 정신을 소지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이들은 어떤 세계관적 선택에 의해 죽림(竹林)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이들은 현실 정치의 풍파에 어쩔 수 없이 죽림으로 밀려나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있던, 한때는 ‘잘 먹고 잘 살던’ 집안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의 의미를 지닌 은거나 초월의 길을 걷기는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들은 죽림이라는 공간에서 한편으로는 무신난 이전의 옛 영화를 동경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신들이 지배하는 개경의 풍림(楓林)으로 내려가고 싶은 욕망을 감추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죽림에서 짓는 냉소는 개경에 대한 열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들의 냉소는 무신정권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 부정의 부정’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이인로는 개경을 향한 욕망을 이인로의 뒤를 이어 오세재가 명종12년에 과거에 급제했고, 임춘도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백운소설』에 보이는 유원 이담지, 사직 함순 등의 표현을 참조한다면 이 두 사람도 벼슬자리에 나간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실현한 인물이었다. 문종에서 인종까지 7대 80년 동안 경원 이씨의 후예인 이인로는 조실부모하고 대숙인 승려 요일에게 양육받으며 산사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무신난을 피했고, 5년 후에 환속하여 과거에 몇 번 나간 후 경대승이 권력을 잡고 있던 명종 10년(1180, 29세)의 과거에서 장원을 하여 벼슬에 나간 것이다. 죽림고회라는 모임이 형성된 것은 이로부터 5,6년 후의 일이고, 이인로는 그 중심인물이었다.
참고문헌
「李仁老와 李奎報 漢詩의 對比 고찰 -李仁老의 用事詩에 나타난 新意와 李奎報의 新意詩에 나타난 用事를 중심으로-」,윤인현, 어문연구 통권 제124권, 2004. 12
「補閑集의 破閑集 續補에 대하여」,金善祺, 한국언어문학회, 한국언어문학 韓國言語文學 第59輯
「李仁老의 思想世界」,李興鍾, 역사교육연구회, 역사교육 제46집, 1989. 12,
「 試論對〈歸去來辭〉的蘇軾與李仁老〈和歸去來辭〉」, 金周淳, ,중국인문과학 제30집, 2005. 6
『고전 문학사의 라이벌』,정출헌 外 한겨레출판, 200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