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을 승인했다.
그는 그 대가로 이근택과 같은 훈1품 훈장과 함께 자작지위를 받았고, ‘한일합병’후에는 백작의 지위를 받는다. 그리고 후작의 지위까지 받으며 중추원 고문을 역임한다.
두 번째로 이지용은 그 당시에 내부대신이었다.
그는 이완용보다도 더 일본에 열성적인 친일파였으며
2> ‘을사조약’ 체결의 주역
러일전쟁이 일본 쪽에 유리하게 되자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여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한 이완용은 그 공으로 의정대신 서리 및 외부대신 서리가 되었다가(1905. 12. 8), '을사보호조약'의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고(1907. 5. 2
일본군들이 한밤중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길을 통해서 서울로 진입해 왔다. 이들 응원 병력과 용산 주둔 일본군 제2사단의 철통 같은 경비망 속에서 8월 22일, 나라와 백성을 팔아넘기는 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일을 주동적으로 수행한 이완용. 박제순. 송병준 이하 76명에게 논공행상으로, 혹은
이완용의 생애는, 일단 관계로 나아갔다가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운 후 미국통의 외교관리가 되었다가 아관파천,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친러시아파·친일파로 변신해 가는 과정과 친일파로 변신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매국의 원흉이 되는 과정 그리고 그 대가로 일본 제국주의의 귀족
일본, 독일, 영국, 인도, 프랑스, 이탈리아뿐이다. 이처럼 세계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경제규모와 지위를 지니고 있는 나라가 고작 76년 전만 해도 패전국의 식민지였음을, 세계의 어떤 나라가 곧바로 알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일본에 지배를 무려 36년 동안 받아왔다. 이러한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