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근택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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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이근택에 대해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 이근택은 왜 비판받아야하는가?

Ⅱ. 본론

- 이근택의 생애

- 이근택과 을사조약

- 이근택의 후손들의 행방

Ⅲ. 결론

- 이근택의 친일행각에 대한 비판과 견해

본문내용
Ⅰ. 서론

우리 4조에서는 친일파라는 주제에서도 이근택에 대해서 조사를 하기로 했다.
그에 대한 이유로는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를 떠올렸을 때, 먼저 을사오적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는 것에서부터 우리 조의 토론은 시작되었다.
을사오적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단연 이완용이다.
그 외의 을사오적인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은 이완용에 비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이근택은 을사조약 체결당시, 군부대신으로써 조약을 승인한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 4조에서는 요즘의 북핵문제에 따라 이완용을 제외한 다른 을사오적 중 이근택에 대해서 좀 더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전조사 중 우리는 이근택이 처음부터 친일파가 아니라 오히려 국왕의 측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친일파들과는 조금 다른 그의 생애를 친일파 중 같은 을사오적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근택과 다른 을사오적들의 후손들의 생애까지 비교함으로써 이근택이 다른 친일파들보다 더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Ⅱ. 본론

⓵. 이근택의 생애

이근택은 186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인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신도 무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된다.
임오군란 때, 그는 피신을 한 민비를 지극정성으로 보좌한다. 그 결과, 민비가 환궁한 후에 그는 왕실과의 연줄을 얻게 되고 중앙으로 진출할 발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근황주의자로써 고종의 측근에서 일하게 된다. 이 동안은 그는 고종에게 헌신을 다 하며 아관파천 때도 고종을 다시 돌아오게 하려는 등의 열성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후의 그는 전과는 다른 노선을 걷게된다.
러일전쟁 초기까지만 해도 대신들은 러시아가 이길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을미사변으로 인해서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감정도 악화되어있는 터라 많은 대신들이 처음에는 친러파의 성향을 띄었고 이근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바뀌어갔다. 일본이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았고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위한 초석인 ‘한일의정서’를 승인시키기 위해서 대신들을 회유협박하기 시작했다. 친러파이지만 친일성향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던 이근택은 상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자 친일노선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의 친러성향을 씻기위해서 남들보다 더 앞장서서 친일행동을 벌이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에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일본에게서 훈1등 훈장과 함께 자작지위를 받는다.
그 후에 그는 많은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되고 그로 인한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된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끝이없어서 대신의 지위지만 고종을 능멸하기까지 이른다. 그래서 그는 한 때 파면되기도 하지만 일본의 도움으로 다시 지위를 회복하고 합병때에는 중추원 고문의 자리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1919년 일본의 무단통치 시절까지 부귀영화를 이루다가 사망한다.

⓶. 이근택과 을사조약

이근택의 친일행각 중 가장 큰 사건이 바로 을사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을사조약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을사오적에 대해서 간단하게 조사를 했다.
첫 번째로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써 을사조약을 승인했다.
그는 그 대가로 이근택과 같은 훈1품 훈장과 함께 자작지위를 받았고, ‘한일합병’후에는 백작의 지위를 받는다. 그리고 후작의 지위까지 받으며 중추원 고문을 역임한다.
두 번째로 이지용은 그 당시에 내부대신이었다.
그는 이완용보다도 더 일본에 열성적인 친일파였으며 백작까지 이르렀고 그 또한 중추원 고문을 역임한다. 을사조약으로도 유명하지만 일제강점시기에도 도박에 미쳐서 나라를 완전 버린 친일파로 유명하다.
세 번째로 박제순은 외부대신이었으며 을사조약에서 외부대신으로써 가장 반대를 해야할 그가 소극적 반대로 사실상 을사조약을 인정함으로써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또한 자작을 하사받았으며 중추원 고문을 역임한다.
마지막으로 권중현은 농상공부대신이었다. 그 또한 박제순과 같이 자작의 지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의 자리를 역임했다.
이근택은 을사조약으로 인해서 훈1등 훈장과 함께 자작의 지위를 받았다. 그리고 미국 공채로 30만원이라는 거액을 일본에게 받는다.

을사오적 중에서도 이근택과 이완용은 가장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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