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한자가 창제된 이후에도 문자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즉, 구어는 우리말이었으며 문어는 여전히 한자로 존속하였다. 특히, 상위계층인 사대부들은 한글을 천시하고 한문을 높이 평가하여 한자생활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이들의 이러한 가치관과 문화가 반영된 것이 바로 한문학이
2. 16,17세기 당시풍의 성행
선조 연간의 문운의 융성을 ‘목릉성세(穆陵盛世)’라 일컬어 왔다. 이 시기는 한국 한문학사에서 절정의 장관을 연출하였다. 고려 말 이래 선초에 이르기까지 성행했던 송시풍(宋詩風)은 중종ㆍ명종 시기를 기점으로 점차 변화의 조짐을 보이다가, 선조ㆍ광해연간에 이
이조건국직후의 사회의 상대적인 정과 융성의 국면을 반영하고 봉건국가의 강화의 지향을 보여준 건국송가자고, 유교문화의 화립과 발전을 반영한 도학시가 가사조, 도교사상의 영향을 반영하고 이 시기 사외당쟁현실의 결과로서의 <강호시가>, <은일시가>사조, 북방개척과 국토방위의 주제를 보여준
문단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한문학 분야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며 망명지 중국에서는 우리나라 한문학을 중국에 소개하는데 진력하는 한편 그와 교유한 남방의 문인들로부터 양계초(중국 청말 중화민국 초의 계몽 사상가이자 문학가)에 필적하는 대가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문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