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은 제자 조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표현으로 이이를 촉망했다. 이이는 23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이황과 이이였다.
이이는 주기론의 입장에서 관념적 도덕 세계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경험적 현실 세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주자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원론적인 이기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현실 문제의 개혁을 과감히 주장한
퇴계선생은 높은 벼슬자리는 마다하고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원했다. 원래 이황은 원래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리는 것을 꺼려했으며 그의 형이 간신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자 재야로 물러가 숨을 굳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황이 살다 간 16세기
■ 서 론
퇴계이황, 그는 한국 철학사에서 조선시대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석학이요, 동시에 유교전통에서 보면
도학정신을 생활 속에 실천하여 인격으로 구현한 정인군자(正人君子)로서 조선시대 도학적 인격체의
전형인 선비로 귀감이 되고 있으며, 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주자 이후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