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해서는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민간의 부담을 균등히 하려함.
김상헌,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자. 청의 압력에 즉시 무력으로 응징하자고 주장.
청과는 사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파.
대의명분을 강조한 성리학자.
척화론의 주장.
1. 명과의 2백 년 넘
무력반정을 일으킨다. 이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숭명배금의 외교정책을 펼친다. 한편 반정공신 중 한명인 이괄은 반정 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데(이괄의 난), 반란이 실패 한 후 청으로 도주해서 광해군이 억울하게 폐위되었다고 주장하여 청은 정묘호란의 명분을 가지게 된다.
앞에서 살펴본 조선의 국방태세와 방어실태에서 임진왜란의 초기에는 조선의 참패만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전쟁 준비가 거의 없는 가운데 일방적인 침략을 당한 조선의 전란 피해는 더욱 컸다.
2) 일 본
임진왜란이 일어날 시기 일본에서는 풍신수길이 전국시대를 끝내고 전국통일이 이뤄낸 상
평화의 근본이다. 머뭇거리지 말자. 지주의 횡포로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1633년) 인조 11년 2월 2일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인조의 이러한 행위는 말로만 표현했을 뿐, 실제 행동으로 후금에 대한 보복행위를 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인조는 존명사대를 계속 유지하였다. 즉 최고 통수권자인 국왕이 무조건 명나라와의 외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