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사건 : 1961년 5 ․ 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원대복귀와 민정이양을 약속한 혁명공약과는 달리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일본의 자본을 끌어들여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려던 박정희정권에게 한일회담은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운동처럼 예술작품이나 각종 회고록에 등장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동안 역사의 그림자 속에 묻혀있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과 이에 연결되는 인혁당 제건 사건 모두 박정희정권의 조작극임이 사건당시부터 꾸준하게 주장되었지만 진실은 계속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오
박정희는 정말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신체제를 만들었던 것일까?
가. 국제정세 및 남북관계의 변화 : 주한미군 철수와 동아시아 데탕트 및 남북대화의 개시
미국은 1969년 9월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들의 손으로’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한국 정부는 독트린 발표 당시 베트남에 한국
학생 시위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다른 대학에서도 동맹휴학과 성토대회가 확산되었고 학생들의 반정부시위는 급속하게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2) 민청학련사건박정희정권은 반유신체제 운동에 대처하기 위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운동에서 학생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곳으로, 지식인들(교수·문인)들이 시국정세에 비판을 가하고, 이를 따르던 학생들도 많았다.
15일 서울역 회군 서울역 회군: 각주4)에서 보듯이 학원민주화열기는 5월 15일 밤부터 16일 아침까지 계속된 서울지역 23개 대학과 지방의 23개 대학의 총학생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