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의도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삼국간섭으로 끝나자 무쯔는 일본의 승리에 대한 자신의 공과를 높이는 ,한편, 삼국간섭을 일으킨 러․불․독에 대하여 비판하는 등 무쯔 자신의 시각을 들어내고 있다.
진위방은 청일전쟁 이후의 동북아 관계에 대하여 연구해온 학자
일본을 비롯하여 여러 서구 열강이 조선에 개입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조선 내에서 일본의 지위가 기존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던 일본과 기존의 영향력을 고수하고자 하는 청과의 직접적인 대립이 청일전쟁이라는 하나의 무
일본의 문명개화사상(文明開化思想), 그 중에서 특히 후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는 고종의 개명화 에 노력하며서 여러가지 개혁사업을 벌이는데, 그것이 결국 개화파 주도 및 방식에 의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으 로, 기존 집권층의 반발을 받았다.
더구나 개혁정책에 반발하는 구군인층
방행으로 돌렸다. 이러한 반복은 계속되어 거의 1세기동안이나 지속되었다.
19세기야 말로 세계적으로 영국과 러시아의 대결이 열강대립의 주축을 이룬 시기였다. 그런데 이 영·러의 대립이 크림전쟁(1853~1856)을 계기로 발칸으로부터 동아시아로 옮겨졌다. 전쟁의 소강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과 프
만들려는 자강정책이었고 전면 서양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880년 중국의 ‘총리아문’과 비슷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혁의 중심기관으로 삼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성격의 개화논리는 차츰 동도서기론으로 구체화되고, 대한 제국기에는 구본신참, 즉 옛것을 근본으로 하고 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