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는 제 11회 선전에 「정물」을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그해 가을 제 3회 <전국 남녀 학생 작품전람회>에 중등 회화부에서 「자화상」으로 삼등상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이쾌대는 그림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제작된 그림으로 1932년 「남자의 초상」과 「책보는 두 여인」,
이쾌대는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이 대단하긴 대단했던 모양이다. 최열(미술 평론가,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회원)은 이쾌대를 뿌리 깊은 나무에 비유했다. 어떤 기법이나 양식이든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유화물감이라는 생소한 재료가 국내에 들어온 것은 20
I. 들어가며
중간발표에서 우리조는 월북화가 이쾌대의 유년시절, 미술수업기, 아내 유갑봉과의 만남, 형 이여성의 영향, 그리고 그가 월북한 동기 등 그의 삶 전반에 관한 것을 알아보았다. 이번 기말발표때는 아내 유갑봉이 지켜내 우리에게 알려진 화가 이쾌대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의 미술세계를
본과 수호조약을 맺었던 1876년 12월 23일 황해도 봉산에서 가난한 선비 집안의 6남매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웠던 데다 흉년이 자주 들어 어려서부터 끼니 굶기를 예사로 하였으며 그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다.
주시경 선생은 여섯 살 때부터 집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서울에 올라와서도
본질이다. 그린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섭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중섭의 예술은 다른 천재들과 같이 민족적이다. 중섭의 민족은 한국적이요, 한국하고도 북방적 요소에 가득찬 한국이었다. 중섭의 예술이 한국적이라는 것은 그이 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유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