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를 전공한 후 돌아와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1932년 휘문고보 오학년이었던 이쾌대는 제 11회 선전에 「정물」을 출품하여 입선했으며, 그해 가을 제 3회 <전국 남녀 학생 작품전람회>에 중등 회화부에서 「자화상」으로 삼등상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이쾌대는 그림에 대한 관심을 더
작품속의 여인은 이쾌대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속의 인물은 일상 속에서 마치 스냅사진에 잡힌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철저하게 그림을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가 입은 옷은 궁녀의 옷이나 신부의 혼례복처럼 의례를 위한 것이다. 색체의 대비와 반복이 화면 속에서 가벼운 흥분을
이쾌대의 업적
화가 이쾌대가 한국 미술사에 기여한 바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일제강점기 하에 사회와 거리를 두지만 비판은 하지 못했던 다른 근대 화가들과는 다르게 한국 근대 미술의 실체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첫째로 그는, 그 때 그 때의 한국 근대 미술의 논점들을 반영하는 그림
미술새내기들(최초의 서양화가들, 첫 유럽 유학생들)은 유화물감이라는 재료를 받아들였지만 그 성과는 썩 좋다고 할 수 만은 없었다. 그도 그럴 듯이, 그저 유화물감이라는 재료는 단순히 그림의 재료에 그치는 것이 아닌, 서양 미술의 오랜 감성과 깊이가 담긴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쾌대는 그
대의 질곡을 감안 한다면, 웃음과 해학과 풍자가 곁들인 그의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삶의 위안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인상 깊었던 「문장」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앞뒤 울타리에서 부수수 하고 떨잎은 진다. 바로 그것이 귀밑에서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