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정묘호란(丁卯胡亂)
-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면서 일어난 전쟁
-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지속
- 인조 즉위 후 집권한 서인의 친명(親明) 정책과 누르하치의
조선에 대한 주전(主戰) 정책이 맞물린 결과
정묘(丁卯) 년에 발생한 오랑캐의 난
→
무력반정을 일으킨다. 이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숭명배금의 외교정책을 펼친다. 한편 반정공신 중 한명인 이괄은 반정 후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는데(이괄의 난), 반란이 실패 한 후 청으로 도주해서 광해군이 억울하게 폐위되었다고 주장하여 청은 정묘호란의 명분을 가지게 된다.
Ⅰ. 17세기(17C)의 한국정세와 세계정세
1. 정묘호란
1623년 서인들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대북 세력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반전되었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들은 광해군과 대북 정권의 중립적인 대외정책을 친명 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대해서는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민간의 부담을 균등히 하려함.
김상헌,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자. 청의 압력에 즉시 무력으로 응징하자고 주장.
청과는 사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파.
대의명분을 강조한 성리학자.
척화론의 주장.
1. 명과의 2백 년 넘
5) 병자호란 당시의 남한산성의 의미 : 남한산성의 돌맹이, 기왓장 하나까지도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 이었다. 남한산성은 우리역사 속에서 우리민족이 당한 침략에 대항한 항전 정신과 독립정신이 깃들어진 장소이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도성과 한강유역을 방어하는 군사적 최적의 요충지로서 비록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