却說朝鮮自迭遭亂事, 國勢愈衰, 國王李熙, 又是個貪安圖逸的人, 凡事都因循苟且, 不願振作, 因此日貧日弱, 寇盜紛起.
각설조선자질조난사 국세유쇠 국왕이희 우시개탐안도일적인 범사도인순구차 불원진작 인차일빈일약 구도분기
각설하고 조선은 번갈아 난리를 만나 나라 기세가 더욱 쇠약하고 국
1.사림파의 연원과 계보
사림이란 원래 어의상으로 ‘사족’(士族),‘사류’(士類) 등과 동일한 의미로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의 집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두어 달리 쓰여 왔다. 이때의 ‘사림’은 15~16세기 정치 상황과 관련
조선조의 건국과 더불어 가장 큰 변화라면 무엇보다 국시로서 고려의 불교가 이씨조선조에 들어서면서 신흥문학인 성리학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바꾸어 말해 조선조는 〈척불숭유〉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성리학을 건국의 이념, 국시로 삼고 봉건 왕국의 제반 문물제도를 재 정비, 확립하였다. 성리학
却說葉志超旣逃歸遼東, 丁汝昌又敗回旅順, 警報迭達北京.
각설섭지초기도귀요동 정여창우패회여순 경보질달북경
각설하고 섭지초는 이미 요동에 도망가고 정여창도 또 패배하여 여순에 돌아갔다는 놀라운 보고가 번갈아 북경에 도달했다.
光?帝大爲懊惱, 卽命將葉志超、丁汝昌革職, 衛汝貴、方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등 초기 사림에게 크게 주목되고, 기묘사림이 이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것은 바로 그러한 추세를 말해준다.
조선왕조의 주요 창업자의 한 사람인 정도전은 신랑이 신부 집에 머물면서 처가살이를 하는 고려~조선 초기 혼인제도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신랑이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