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박명림은 그 근거로 4.3초기 무장대와 경비대간의 '4․28 평화협상'이 미군정 경찰의 방해로 무산된 점과 1949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 미군이 그리스민주주의군대의 온건한 정전협상 제의를 거부하고 초토화전술을 구사한 것과의 유사성을 들었
항쟁의 역사에서 정치적 이슈로 부각되어 나타나면서 그 의미가 변질이 되고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그리고 4·3 사건의 주체가 분명히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제주 4·3 특별법’과 같은 수혜적인 모습으로 당시의 피해자들과 그 피해자들의 유족들을 위로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나 그 가해 주체를 흩트
4.3 담론 등에 더 의존하고 있었다.
2세대와 3세대를 포함하는 제주주민의 4.3사건에 대한 기억방식은 의견형, 원인분석형, 사례형, 가해피해론, 희생론, 역사평가형, 과정형, 이념.대립형으로 나뉘었다.
Ⅱ. 제주 4 3사건(제주 4 3항쟁)의 배경
1947년에 들어서면서 미 군정은 철도노조파업, 정판사사
제주도 사태를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제주도민들을 공산주의자로 여겼다. 이 때문에 무차별적인 인명살상이 빚어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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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요인
1. 좌익의 결성과 활동
해방 직후 전국적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
중면(현재 서귀포시) 농민들은 ‘납세불납동맹’을 조직하여 세금 납부와 뽕나무 묘목 강제 배포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고, 1931년 11월 7일에는 제주시 산지축항공사장 노동자 40여 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파업투쟁을 전개했다.
1932년 세화리 ‘잠녀항쟁’은 당시 가장 격렬했던 반제투쟁의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