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전율할 학살극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음모론'의 요지는 \"미군은 대공투쟁의 전초기지로서 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박명림은 그 근거로 4.3초기 무장대와 경비대간의 '4․28 평화협상'이 미군정 경찰의 방해로
제주도 사건 종합보고서’를 보더라도 앞에서 말한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당시 상황을 초기에 파악하고 현명하게 처리하였다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단순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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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사건(제주43항쟁)의 역사적 의미
제주4
제주도의 상황도 타 지역과 비슷해서, 1922년 12월 15일부터 제주-오사카 간 직항로가 개설되자 많은 도민들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기록에는 1934년 오사카 거주 제주인의 수가 5만 45명(남: 29,365명, 여:20,688명)이라고 나와 있다.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4(당시 제주도 총 세대수 47,466호, 1세대당 1.1명
제주4.3 당시 선포된 계엄이 불법이었는지 여부와 중산간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 방화나 집단학살극이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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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제주43항쟁(제주43사건)의 역사적 배경
제주4.3은 한마디로 미군정 아래에서 한민족이 안고 있는 집약적 모순이 빚어낸 역사적인
제주43항쟁(제주43사건)의 정의
‘제주4․3’에서 ‘4․3’은 제주도 무장대가 단선(單選), 단정(單政)의 반대와 조국의 자주 통일, 극우세력의 탄압에 저항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미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을 향해 본격적으로 공격을 개시했던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4월 3일 이후로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