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으로 삼았다 (日本帝記를 살펴보면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없으니 아마 변방 시골의 조그만 왕이고 중앙의 왕은 아닌 듯하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찾아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을 보고 바위로 올라가니 바위가 다시 업고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서 왕에게 알리니 부부가 서로
고구려로 달려가 왕자 보해를 구해냈다. 왕은 보해를 만나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일본으로 간 미해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박제상은 이를 알고, 다시 왜국으로 가서 거짓으로 고했다.“계림의 왕이 무고한 아버지와 형을 죽였기 때문에 이곳까지 도망 왔습니다.” 왜왕은 이를 믿고 박제상을 거
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띤다.
우리는 내물왕과 박제상에 관한 일화를 두 사료를 통해 분석하고 비교해 보면서 어느 것이 더 역사적 타당성
왕조
태조 왕건은 고려의 북쪽, 고구려의 옛 땅을 찾으려고 요나라를 치려 하였으나 백성들이 전쟁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만 두고 백성들을 돌보려고 3년 동안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걷지 않고 대신 고려의 고유한 풍속과 제도, 그리고 팔관회와 연등회는 꼭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왕권을 안정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