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진언에 도학정치의 뜻을 이해해나가지만, 그 시대가 가지는 혼란성과 성리학적인 토양의 부족등으로 그의 개혁사상은 뜻을 펴지 못했다. 피자는 조광조의 역사인식과 사상을 비교 검토하였다. 그의 사상과 개혁내용을 살펴보면서 그가 당면했던 현실적 문제들을 살펴보고, 정암 자신이 그 문
사림의 대두
1.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분열
고려 말기 무신세력의 몰락과 권문세족의 횡포로 인한 폐해 속에서,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통해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사회계층이 중앙정계에 등장했다. 신진사대부는 원과의 문화교류과정에서 선진적인 학문인 성리학을 수용했고, 성리학을 통해
Ⅰ. 주자학(성리학)의 흐름
중국의 성리학에 한국에 도입된 것은 주자 사후 100여년이 지나서 원나라로부터 이루어 졌다. 安珦이 도입한 성리학은 백이정, 우탁, 이제현, 이인복 등에 의하여 연구되었으나, 충분히 소화되어 토착화하기 시작한 것은 牧隱 李穡에 이르러서였다. 목은 이색에 의하여 수용
사상 면에서 이단 당시 궁중과 백성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것이었으나 정암이 추구하는 도학에서는 성리학의 실질적, 제도적 문제(전기)에 뿐만 아니라 철학적, 이론적 논의까지 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들이 이단이다.
과 사교가 성행(소격서, 기신제)하여 궁핍했던 경제에 더욱 타격을 주었다
조광조의 도학사상(심산, 이상성)
그리하여 중종은 재위 10년(1515년)에 성균관의 추천을 받아 당시 사림들의 젊은 영수였던 조광조를 등용하게 된다.
사림은 의리와 명분을 중요하시 하여 기존의 군주권에 대해 신하가 배반하지 않을 의무와 성리학적 세계관을 통한 군주권의 안정에 목표를 두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