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는 말
본고는 먼저 실학이 발생된 시기인 조선말의 사회적인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내우왜란의 어려움 속에서 왜 유학이 본래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마치 역사를 망쳐 놓은 것으로 비추는지를 살펴보고서야 실학의 배경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실학의 학문적 배경에서는 먼저 先秦儒學에
조선 초기의 정도전 ∙ 변계량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려 말ㆍ조선 초의 유학자들이다. 초기의 시조작가가 당대의 쟁쟁한 성리학의 석학들이었다는 사실은 곧 시조가 형성되는데 있어서 그 내용적인 형성요건을 제시하는 데에 성리학이 중대한 의의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즉, 신라 이후로
말한다.
이러한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말에는 개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갑오경장의 주도자들은 양반과 평민의 동등, 조혼의 폐지와 과부의 재혼, 노비들의 인신매매 금지 등의 법제화를 주장했고, 서재필 선생도 독립신문에서 남녀 차별을 비판하였다.
그 후 일본
말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충렬왕을 호종(護從)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이색, 정몽주, 길재,
유학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전래되었으며, 그것은 어떻게 정착되었는가? 또한 신유학이 우리의 농업 기술 발달에 끼친 영향과 신유학이 마련한 사회제도(사창제社倉制, 향약鄕約)의 시도 및 보급이 우리의 역사 발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정착된 신유학으로 인한 조선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