것 같다. 퇴계이황 선생에 대하여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고 있었고, 우연히 1000원권 지폐를 살펴보게 된 것이 이번 조선시대인물 조사 레포트 인물선정의 계기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구하기는 하겠지만 레포트를 쓸 때 책을 활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맨 먼저 도서관에서 퇴계이황에 관한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실학의 비조로 꼽히며,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한 의병장과, 정치·학술계를 주도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우리 나라 교육사에 있어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정치의 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
퇴계(영남)학파와 율곡(기호)학파가 형성되어 각각의 학문적 체계를 발전시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연산군 시대에 태어나 사화의 시대를 살았다고 할 정도로 고난을 겪었으며 을사사화에서는 친형이 연루되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한 격동의 시대에 관직에 나가는 것보다는
대한 열정과 공감대 때문에 만나자마자 의기 상통했고, 학문적으로 보완하는 관계였다. 퇴계가 새로운 시대 사상인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율곡은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화한 것이다.
이 레포트를 통해 이황과 이이의 사상을 정확히 구분하여 경쟁관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