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에 대한 조사를 계속 하였고, 향가와 이두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35년 『郷歌及び吏読の研究』로 제국학사원은사상(帝国学士院恩師賞)을 받았다. 이 시기의 그의 대표 저서들을 보면, 한국어와 일본어 계통론에 관해 연구한 『조선어와 일본어朝鮮語と日本語』(1934),
및 욕망, 3.. 조선의 실학자들이 고민했던 당시 시대의 문제에 대해 서술하였다.
II. 본 론
1. 퇴계의 ‘이(理)’와 사단칠정, 성리학의 이(理)
1) 퇴계의 ‘이(理)’와 사단칠정
퇴계가 기보다는 이의 작용성을 강조했던 것은 도덕적 표준을 객관적 사물에서 찾고자 했던 주자의 노력과 상통하는
Ⅰ. 농학의 발달에 따른 농서편찬과 농서간행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중요하게 행하는 일은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지방관(勸農官) 및 농업경영자에 대해 기술교육을 베푸는 일이라 하겠다. 조선 전기에 있어 이 작업은 특히 농서의 편찬 및 보급이란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 시대 봉건정
함으로 지방의 사학에 허용적인 정책을 채택
*교육은 관리 임용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
-교육기관인 관학은 국가정부의 철저한 관리 하에 있었음
학생의 선발, 교육과정, 학사운영, 교수임용 등의 엄격히 통제 하에 이루어 졌음
(서양의 가정의 사교육 및 교회의 지배하에 있던 교육과는 매우 다름
조선의 교육기관을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었고, 여기에 기술교육기관을 포함시켰다. 즉 서울중앙의 성균관(成均館)과 4부학당터(史部學堂攄), 지방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향교(鄕校) 중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된 양천향교(陽川鄕校), 그리고 기술교육기관 중 사역원터(司繹院攄) 및 광혜원터(廣惠院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