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실학사상과 인적 및 사상적 맥락을 가졌었고, 또 실사구시(實事求是)이용후생(利用厚生) 등 실학파가 즐겨 표방하던 것을 이어받았다. 또 뒤에는 실용의 학문으로서의 실학이 민중 가운데에 고취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는 외세의 충격에 대처하는 현실적 방안으로서라기보다도 사
유학하여 북방의 학자들도 그보다 나은 사람이 별로 없다”라고 말 한 것을 박제가가 인용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북학’의 정신은 메마르고 빈곤하였던 조선후기사회를 구제하려는 것이다. 비록 소수였고 소극적이긴 했으나 북학사상을 가진 학자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
사상이 소망하는 목표인 자기수양을 통해 자신의 경지를 성인의 단계까지 높이고 유교에서 오늘날에 윤리라 불리어지는 ‘수기’와 정치문제인 ‘치인’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이 현실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상상적 근간을 유교로 두고 있으면서 기존의 성리학적 비판과 현실 비판으로
실학이 성리학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여 실학을 성리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려하거나 혹은 性理學 대 實學이라는 도식적인 兩分法을 전제로 한 관점으로 인해 쉬이 평가되어왔다. 따라서 오히려 그의 실학관과 문학관을 왜곡시키거나 정약용의 문학론에 대한 역사적 의의 등이 분명하게 내
사회현실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렇듯 봉건사회가 해체될 조짐을 들내 보이고, 지배계급 내부의 전재과 서학에 의한 새로운 사상적 충격이 어우러지던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열하일기》를 통해 청나라의 문물 제도와 생활 풍습을 소개하고, 조선의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