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반응이 서양문물을 그저 신기한 노리개로 보는데 그쳤다면 명말 이후에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서 들어온 각종 과학 이론들은 실제로 정부나 궁중에서 유용하게 쓰였으며 또한 이민족인 후금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서양 대포는 명나라에게는 절대적 존재였다.
중국과 서구가 새
조선 중기 16세기 이래 중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한 서학서(西學書)에 의해 소개되어 졌다. 이는 서양사상과 문물(文物)로써 좁은 의미에서는 천주교를 의미하며, 그 때문에 이를 서교(西敎)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고도 하였다. 서학(西學)의 과학성은 기술 관료들
조선천주교회의 창설과 함께 본격적인 조선천주교가 시작되었다.
16세기 초 전래된 서구 사상은 17세기 후반 조선의 실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학문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당시의 주요 책자는 <한역 서학서>로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에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천주교와 서학을 전할 목적으로
천주교 내부의 문제, 즉 수도회 간의 대립 등을 전례 논쟁의 배경, 원인으로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주겸지 저, 전홍석 역)에서는 예수회 이후에 도미니크회를 비롯하여 프란시스코회 등의 수도회가 중국에 오게 되고, 그에 따라 선교사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업무상 마
서양인과의 접촉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지난 20세기의 반성을 시작하면서 서구에 의한 강간을 화두로 올렸는데, 그 이유는 지난 100여 년간이 '제국의 시대' 였기 때문이다. 강간의 일방적인 타인에 대한 자유침해와, 제국주의는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과연 현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