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역사학은 무엇보다도 역사학으로서의 독립성과 민족사학으로서의 독자성이 함께 달성되어야 하는 과제와 전통적인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낡은 역사관을 극복하여야 하는 동시에 역사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시켜야 한다. 여러가지 혼돈 속에서 해방 후 민족분단으로 남한은 실증사학이
실증적인 면모를 보여 줌으로써 1930년대 민속학 정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민속학 연구는 한국문화의 세계성을 입증하려는 작업이었으며 과거의 일본문화가 조선으로부터 항상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식민지 지배의 허구성을 논증하려 했다. 8·15해방이후 본래의 관심이었던 한국역사
한국사관’을 흔히 ‘식민사관’이라고들 부른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용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식민사관’이라 하면 우선 식민을 하는 쪽이 주체인지, 식민을 당하는 쪽이 주체인지 애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관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범세계적으로 일어났던 하나의 역사적 현상인 식민
Ⅰ.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내선일체론
일제하에서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식민지 통치의 목표는 동화주의의 완성에 있었다. 일제는 그간 동화주의의 다른 표현으로 일시동인, 내선융화 등의 용어로 식민지 차별을 무마해 왔다. 그나마 우가끼(宇垣一成) 총독이 부임하면서 내건 내지
한국인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 역사자체가 설명되지 못한다는 것은 실증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도래인이 한국인이라고 밝히지 않았고 그들에게 끼친 우리의 역할도 악의적으로 곡해하고 축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중국-한국-일본의 관계를 정리할 때 이들의 관계를 잘 이해하려는 것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