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밝혀 놓으신 까닭에 비록 이로써 죄를 얻는다해도 한이 없다ꡓ고 하였다. 이 결심은 확고한 것이었다. 왕수인의 제창으로 말미암아 육학(陸學)은 진실로 명나라에서 부흥하여 남송보다 더욱 성행하였다. 사람들은 왕수인의 공헌을 말살하지 않고서 당시에 그것을 양명학이라 불렀으며, 또 그
주자의 도통에 반한 이단 즉 사학 불교·도교·육왕학·서학을 배척하는 말이 된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였고, 그 정신은 송대의 이정을 거쳐 주자에게 계승되어 성리학을 통하여 철학적으로 더욱 심화되고 이론화 되었다. 벽이단사상은 곧 유학(성리학) 이외의 이단과 사설을 배
들어가며
양명학은 왕양명(1472~1528년)에 의해 성립되어 주자학과 더불어 중국 유학(儒學)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고, 동아시아의 유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조선에서는 양명학이 성공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양명학의 성립은 주자학에 대한 비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