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대의 오손공주 세군, 왕소군, 채문희 등과 당대의 문성공주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후세에 가장 화제가 된 여인은 채문희와 왕소군을 꼽을 수 있다고 한다.
박한제교수는 채문희 얘기도 하는데, 중국 역대 비극적 여인의 전형처럼 흔히 거론되는 채문희의 본명은 채염으로 후한말 저명한 학
죽림칠현 실제로 죽림칠현은 술만 마시고 청담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속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으나 결국 세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죽림칠현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이 대처하던 전통적 방식, 즉 역사와 노동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자연과 은일
본관 황려(黃驪:驪興).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 인저(仁氐).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1207
박해 아래 위태로운 세월을 보낸 시기이다. 전반기의 작품으로는 <백마편>, <명도편>가 있고 후반기의 작품으로는 <증백마왕표>, <우차편>, <칠애>, <잡시>, <야전황작행>가 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오언고시의 표현 역량을 확대시킨 것이고 그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생각들을 정교하게 표현하는데에
죽림칠현 중국 위(魏)·진(晉)의 정권교체기에 부패한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
을 본뜬 죽림고회를 연다고 했다. 산수나 찾아 즐기며 고결한 문학을 한다고 표방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p16~17
이러한 죽림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