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정부적 차원에서 청나라로부터 서양역법 수입 노력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ㆍ청간에 군신의 맹약을 맺은 17세기에 불편했던 양국관계가 18세기에 들어 점차 안정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 18세기 후반에는 북학론의 수용으로 대청관계가 새롭게 조정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중심(大宗)으로 하고 권철신 · 이가환 · 안정복 등이 주축이 되어 제도개혁론을 주장하는 18세기 전반의 성호학파와 청나라의 문화와 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이자는 담헌 홍대용(1731-1791) · 연암 박지원 · 초정 박제가(1750-?) 등이 중심이 된 북학파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
대한 심적 거리감은 더욱 축소될 수 있으며 이 순간의 설렘과 발걸음이 ‘가기(佳氣) 총총야라’에서 확인된다. 비록 한 수밖에 전하지 않지만 정철이 연행 도중 촉발된 감회를 시조로 표출하기도 했음을 보여주고 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만한 작품이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외국 체험 문학은
서양 학술과 서양 문물을 연구하는 것을 뜻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조선 후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고 극복하려 한 대부분 사람들의 탈출구 중의 하나였다. 그것이 몰고 온 평등사상, 보민 사상 등은 억압받은 민중들에게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서학, 즉 천주교의 도입은 한국사에서 귀중한 자
연암 박지원이 수필과 같은 신변잡기적 특성을 지닌 글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것은 <동란섭필>의 주 내용이 주자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사람들이 주자가 소서(小書)를 없앤 것을 배척하는 것은, 이 세상의 한 가지 큰 시론이 되었다. 주죽타의 글에서는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