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칼빈과 제네바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이름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빈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교회음악에 있어서도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서른여섯 곡의 개신교 찬송가를 작곡할 정도로 교회 음악가이기도 했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이 세 사람은 종교개혁에 대한 업적도 크게 인정받고 있지만 기독교음악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사람의 기독교음악에 대한 생각은 기
칼빈의 부친 제라르가 죽었다. 제라르의 죽음은 칼빈의 생애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왔다. 그애 말까지 그는 왕실 대학에서 희랍어와 히브리어 공부를 했고 그 이후 오를레앙과 부르쥬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 했다. 1532년 4월에 칼빈은 인문주의자의 입장에서 그의 첫 저서인,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
사람을 간헐적으로 불에 굽는 기계인 에스트라파데(the estrapade)도 있었다. 희생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도 있었다.
바로 이러한 박해를 배경으로 하여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출판된 것이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개신교도들은 자기들의 신앙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서(a reasoned exposition of their faith)를 가지게 되
사람이었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제후와 귀족들의 보호와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정치윤리적 권고는 봉건주의적 질서를 뒷받침해 주는 보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칼빈은 종교적 박해를 피하여 모여들었던 인문주의자들, 자유 종교 사상가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에 의하여 비교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