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 하고 있었으며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또한 남명조식의 학문은 어떠한 특징과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퇴계이황의학문과 더불어 알아보도록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의 학문을 어떻게 평가 하고 있었으며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또한 남명조식의 학문은 어떠한 특징과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퇴계이황의학문과 더불어 알아보도록
“망국”이 아닌 “발전”의 열쇠를 쥐고있는 학문이 아닐까?
조선전기 유학의 거두이자, 전시대를 걸쳐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이자 사상가로 추앙받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조식 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그 열쇠의 실마리를 풀어가보도록 하자.
2. 본 론
1) 퇴계 이황
ꊱ 퇴계이황의
이황의 성리설과 서경덕과 조식학파가 추구한 박학의 학문을 절충하였으면서도, 정치적 입장에 의해 퇴계문화로 이탈해 갔다고 평가된다. 김항주,「한강 정구의 학문과 『歷代紀年』」,『韓國學報』45, 1986, 37~40쪽
허목의 외조가 되는 임제(林悌, 1549~1587)는 북인 학파의 원류가 되는 남명조식과는
실재하는 이를 부정하고 심즉리라고 하여 이를 주관적 심과 동일시한 왕 양명의 주관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다. 이 황은 넷째 부분에서 왕 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설을 반대하였다. 형기(形氣) 즉 물질에서 발한 심(이 황은 이를 도심이라고 불렀다)은 그 출발한 지행도 합일한다면 학문이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