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황은 서 경덕이 수족의 동작 및 보고 듣고 하는 감각작용을 기지묘처(氣之妙處)라고 한 데 대하여 그를 지기묘처로만 설명하고 이에 귀속시키지 않는 것은 편견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기의 작용이 아니라 이의 작용이라고 하였다.(퇴계집 권25 답정자중별지)
이 황은 또 왕 양명의 주관적
남명조식과 퇴계이황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
남명조식과 퇴계이황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
Ⅰ. 서론
퇴계의 철학 사상은 고봉 기대승(1527-1572)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잘 드러나 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퇴계가 서울에 살던 53세 때 이웃에 사는 추만 정지운이「천명도설」을 지어 보여주었는데, 퇴계는「천명도설」의 내용 중 사단칠정에 관한 부분을 개정한 데서 비롯된다.
3) 현장중심의 경영과 생산적인 대비 경영
퇴계는 단양군수로 있을 때 기아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을 썼다. 백성들은 공평하고도 과감하게 구제하기 위해 촌락의 기아상태를 상세히 조사하도록 했다. 이 같은 조사는 부하들에게 맡겨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약한 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