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조식과 퇴계이황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
남명조식과 퇴계이황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로 경상우도와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다. 퇴계는 소과(小科)․대과(大科)를 거쳐 조정의 요직에 나아가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지만 남명은 평생을 산림의 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남명과 퇴계는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단 한번
이황에게 직접 사사한 월천(月川)조목(趙穆), 학봉(鶴峯)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 등이 있다.
(2)남명학파(南冥學派)
남명학파는 남명(南冥)조식(曺植)과 그 문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파이다. 이 학파는 실천을 중시하였으며, 퇴계학파와 더불어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
이 황은 서 경덕이 수족의 동작 및 보고 듣고 하는 감각작용을 기지묘처(氣之妙處)라고 한 데 대하여 그를 지기묘처로만 설명하고 이에 귀속시키지 않는 것은 편견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기의 작용이 아니라 이의 작용이라고 하였다.(퇴계집 권25 답정자중별지)
이 황은 또 왕 양명의 주관적
남명선생집서에는 남명이 그다지 술작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4. 퇴계이황퇴계는 “유가의 의미는 스스로 분별되는 것이니, 문예에 공교로운 사람은 선비가 아니며 과거에 급제함을 취(取)하는 사람은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상의 허다한 영재가 세속적 학문(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