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
풍납토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25년(乙丑年) 8월 대홍수로 서벽이 유실될 당시 중국제 靑銅·斗를 비롯하여 耳飾金環·銅弩·白銅鏡·銙帶金具·紫紺色 琉璃玉, 4구획 원문수막새 등 중요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성 내부에서 이렇듯
풍납토성발굴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 실츨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7.
등이 이뤄지면서 백제초기역사 복원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다. 백제 초기 도읍지의 위치비정은 한 유적의 발견 차원을 떠나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빙성문제, 사적지의 종합적인 보존복원책(특히 풍납토성에 관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몽촌토성 것보다 앞서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몽촌토성보다는 풍납토성이 초기 왕성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Ⅴ. 미궁에 빠진 왕성의 위치와 떠오르는 풍납토성
백제는 고구려에서 내려온 유이민들이 세운 국가였다. 온조와 비류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이 고구려
1.머리말
삼국사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역사를 기전체로 서술한 책이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설화를 포함한 삼국유사에 비해 사실에 충실한 기록을 하고 있는 삼국사기지만 삼국의 건국신화가 기록되어있다.
고대 국가에서 종교는 큰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풍납토성, 그리고 춘궁리 일대를 포함한 이성산성, 이렇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각각의 추정 도읍지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은 위례성이라고 하는 그 어원에 대해서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2. 위례성의 어원
백제의 왕성 이름인 ‘위례(慰禮)’의 원의는 ‘우리’, 즉 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