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과 결부된 제국주의의 물리력에 있었다. 어느 봉건 사회와 마찬가지로 조선 사회도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조선 사회의 국가 종교라고도 할 수 있는 유교에 대한 다른 종교의 도전은 곧 정치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 대한 대응은 종교 논쟁에
1. 중국의례논쟁
천주교가 전래되던 당시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권에서는 생활 전반에 걸쳐 유교사상과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부모와 공자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러한 동양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왜곡되지 않게 전하는 것이 가톨릭교회가 선교과정에서 지닌 어려움이었고 이것
사상적 요소들이 정리되어 실학파의 학파적 성립을 보게 된다. 성호 이익을 중심(大宗)으로 하고 권철신 · 이가환 · 안정복 등이 주축이 되어 제도개혁론을 주장하는 18세기 전반의 성호학파와 청나라의 문화와 청에 들어와 있는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이자는 담헌 홍대용(1731-1791) · 연암
논쟁의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것은 화서학파의 형이상학이 기호학파의 분파적 배경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종합하고 지양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서 이항로의 철학 사상 중에서 그의 이기론의 특징과 그가 이기를 어떤 식으로 인식했는지 알아보고, 심성정의
한국중국학회, 2001, p.179.
엄복의 주장을 좀더 분석적으로 비판하며 자유의 개념에 대한 의견을 내놓은 사람은 양무파 관료 출신이자 대표적인 보수주의자인 장지동(張之洞)이다. 그는 개인의 사적이익 추구행위가 사회 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라고 보며 자유의 개념은 사(私)의 영역인 ‘개개인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