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는 우국애민과 개인적 교양으로 크게 나타난다. 그에게 당시 사회인식을 나타내는 시는 별로 많지 않다. 그의 사회적 관심의 표출은 대체로 온건하고 완곡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별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활과 의식 속에 스며들어 삶 속에서 구현되는 수준 정도이다. 한편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 이해
Ⅰ. 성리학(주자학)의 형성
조선조의 기틀이 확고해진 15세기의 성리학은 사화의 파란을 헤쳐야 하는 사림들에 의해 역사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15세기의 성리학은 곧 사림정신으로 구현된다. 사림들의 사림정신은 따지고 보면 사육신․생육신이 출현하여 드높였던 절의정신에 접목된 것이지만
속에 사는 짐승은 비 올 줄을 미리 알며, 거미는 그물을 치는 재주가 있고, 쇠똥구리는 쇠똥을 동그랗게 굴리는 능력이 있다. 만물이 모두 이와 같이 신령스러운 밝음[靈明]을 받았으니,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심정에 있어서 또한 어찌 사람과 다르겠는가? 그 획획 놀리는 백정의 칼에 벌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