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개요
조선 전기의 중앙 군제(軍制). 1393년(태조 2) 태조는 고려 때의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를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칭하여 여기에 종래의 10위군(衛軍)을 중․좌․우군의 3군으로 나누어 귀속시켜 최초의 강력한 중앙군사체제를 갖추었다. 그 후 3군에 속한 10위는 10사(司)로 개편되
행주대첩이 일어난 시기와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덕양산 정상에 지어진 행주산성은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 순찰사로 있던 권율장군이 이치(梨峙)에서 3만 왜군을 막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수원 독산성에 포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총 지휘관이 되어
Ⅰ. 개요
왜란이후 이 전쟁이 조선, 명, 일본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전화로 인한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전지의 황폐화가 전국에 미쳐 전쟁전에 170만 결이었던 경지면적이 54만 결로 줄어들었다 민간의 생활은 처참하여 ‘인상살식’의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고 조정에 불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임경업군수가 석성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Ⅰ. 산성과 가산산성
가산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되어 있으며 1639년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내성을 축조했고, 영조17년에 중성을 숙종 26년에 외성을 각각 상하 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산성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이 되었다고 한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역사적 현장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