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 이건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가정생활이지 조선후기의 처가살이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
또한 현대의 부부 생활에서도 보기 힘든 “자네”라는 단어의 중복사용, 남편에 대해 하소체를 사용하며 당시여성들의 권리가 지금수준 이상으로 대등하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2. 승사(承詞)
三三五五 冶遊園 야유원冶遊園 : 홍등청루(紅燈靑樓)의 술집.
(야유원)에 새 사람이 나단 말가?
꽃 피고 날 저물 제 定處(정처) 없이 나가 있어,
白馬 金鞭(금편)으로 어데 어데 머므는고.
遠近(원근)을 모르거니 消息(소식)이야 더욱 알랴?
因緣(인연)을 그쳤은들 생각이야 없을
이러한 여류 시 바람은 허난설헌시를 더욱 빠르게 중국대륙에 전파시켰고, 중국문인들이 앞 다투어 허난설헌시를 편집하여 출판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5. 여성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조선시대의 여성은 이름이 없었다. 당시의 여성은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 가문에 대한 것들을 알아보았다.
둘째, 지역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 보고 허난설헌이 살았던 서울과 원이아바님의 배경인 경상지방의 결혼 풍습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폭넓은 이해를 위해 당시의 관혼상제를 지배하던 국법과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당시의 여성상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제도적으로 정착화 되어 억압을 받게 되었다. 그 근본을 이루는 것이 남존여비와 삼종지도의 악법이다. 이 봉건의 굴레 속에 여인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인생을 숙명처럼 살아왔다.
이런 시대에 으뜸으로 꼽히는 여류시인으로 신사임당, 황진이, 이매창, 허난설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