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퇴계는 한때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사학의 유생과 교육자들에게 나라가 학교를 만들어 교육하는 목적에 대하여 지도한 일이 있었다. 퇴폐한 공교육으로서의 개혁의 가망이 없어지자 인간성회복과 윤리 도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서당 교육을 펴 나갔다. 청나라 때 중국이 신주국보(神州國寶)
Ⅰ. 서론
퇴계의 철학 사상은 고봉기대승(1527-1572)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잘 드러나 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퇴계가 서울에 살던 53세 때 이웃에 사는 추만 정지운이「천명도설」을 지어 보여주었는데, 퇴계는「천명도설」의 내용 중 사단칠정에 관한 부분을 개정한 데서 비롯된다.
1. 퇴계의 인간형성관과 “리”의 발현
퇴계는 리의 발현이라는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고봉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과 8년여 동안 성리학적 토론과 사색을 거듭한 끝에 리의 발현을 확신하게 된다. 퇴계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각각 리와 기에 나누어 배속하면서, 마침내 “사단은 리에
Ⅰ. 고려 말 조선 초의 역사적 배경
고려사회에서 조선사회로의 왕조교체는 단순한 역성혁명으로서 왕씨왕조에서 이씨왕조로 전환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고려사회에서 조선사회로의 전환은 단순히 국가를 운영해가는 가장 최 정점에 있는 왕족의 교체만이 아니라 사회 운영의 주체세력의
기대승등 100여명에 이르는 학자들이 학문 활동을 통하여 연구 업적을 남기고 있다. 이 시기에 『주자대전』이 수입되어 성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황의 『주자서절요』와 기대승의 『주자문록』은 주자학에 대한 학습이 얼마나 정밀한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