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의 불교
1. 신라불교의 타락
8세기후반 신라하대에 접어들면서 불교는 귀족적 승관제 및 각종 호국기도법회 등에 의해 왕실 권력과 더욱 밀착되었다.(참고) 특히 대규모의 사찰, 탑(석가탑과 다보탑), 불상(분황사 약사여래불상), 종(성덕대왕신종, 황룡사 종)을 지어 호사한 왕실의 권위
1. 머리말
고운 최치원의 삶은 남북국시대의 상황과 문제와 긴밀히 얽혀 있다. 당시 남북국시대와 당 나라와의 관계, 국내적으로는 육두품의 신분적 차별이 최치원의 삶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당 나라로 유학을 가고 귀국 후 정치활동을 하지만 신라 말기 상황과 신분의 문제에 부딪혀 정치
시대 후기부터 지속된 논의이다. 최근에는 발해사 연구의 성과와 더불어, 더욱더 논리적이며 구체적인 의견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이며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것이 '통일신라론'과 '남북국시대론'이라는 시대구분 용어 문제이다. 따라서 현재 역사학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통일신라론'과
그 의미를 확장하여 사용하고 있다. 원래 금석문이라는 용어는 서적과 같은 종이 기록물에 대한 대응개념으로서, 종이와 다른 종류의 문자 자료를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론에서는 금석문을 통해서 고대사회(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시대)의 모습을 서술해 보겠다.
시대에 발달한 변려문을 물려받는 것으로 장황한 수식이 용건보다 앞섰다. 수식의 수법과 격식의 정도에 따라 문화수준이 평가되었기에 나라에 따른 변용이 있기 어려웠다.
ㄴ. 한문으로 편찬하는 국사
국내용의 책으로 기술에 충실해야만 했기 때문에 자국어로 된 고유명사나 특수용어를 한문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