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한국근현대사와 운요호사건
1875년(고종 12년)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경기만에 불법으로 침입함으로써 일어난, 강화 수비군과 일본군과의 충돌 사건. 강화도 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굳게 지키자 일본은 무력으로라도 문호를 열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군함을 보내어 먹을 물을 구
대한제국 수립 전후시기의 세계는 열강의 식민지 영통분할.재분할경쟁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동북아시아, 특히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은 이때에 이르러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로 압축되고 있었다.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굴복했던 일본은 중국의 의화단혁명 이후 러시아를 견제코자 하는 영국
2. 신민회의 목적과 이념
신민회의 궁극적 목적은 첫째,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둘째, 그 정체를 공화정제로 하는 것이었다. 신민회가 국권회복 후의 정체를 전제군주제의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으로 하지 않고 군주제를 폐지하여 공화국을 세울 것을 공식적 목표로 한 것은 한국역사
)과 백오인사건 즉 신민회사건이다. 안명근은 신민회원이 아니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 사건을 신민회 황해도지회 간부들의 지시에 따라 일으킨 것으로 날조하여 안악군(安岳郡)을 중심으로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이동휘(李東輝) 등 600여 명을 검거하였다.
3.1 운동
3.1 운동의 배경
1)1차 세계대전의 영향
2)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3)독립운동가들의 새로운 기운
4)일제의 국내 수탈 극심
5)고종의 독살설 및 2.8 독립선언
연도(年度)
비밀결사(秘密結社)의 항일(抗日) 독립투쟁(獨立鬪爭)
1910
안악사건(安岳事件)
1912
105인사건(人事件), 하얼빈 계암살미
105인사건이 있다. 1911년 안명근의 데라우치 암살기도 사건을 계기로 일측에 의해 조작된 이 사건으로 유동렬, 양기탁 등 105인의 지도자가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특히 토지조사사업에 역점을 두어 1910∼1918년 2456만 원을 투자해서 전국적으로 실시, 신고절차가 복잡하거나 기타의 사유로 신고
105인사건 등을 변호하였다. 변호사 시절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로 변론하였으며,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3인의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였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애국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이승훈 선생이 세운 평북 정주의 오산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그가 오산에 입학하기 직전에 불었던 소위 '105인사건'의 한파는 한국의 기독교계와 애국계몽운동계 및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들을 얼어붙게 만들어 많은 지도자들이 무고하게 옥살이를 해야 했다.
105인사건으로 이승훈이 구속되자 오산학교 학감으로 취임.
1914년(23세)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가기로 하고 블라디보스톡에 갔다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8월에 귀국. 10월 최남선의 주재로 창간된 <청춘>에 참여.
1915년(24세) 8월 아들 진근이 태어남. 9월 인촌 김성수의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