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文)과 고문(古文)
① 금문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진시황의 분서갱유 후에 많은 지식인들은 은둔하는 생활을 하여야 하였고, 많은 경서들이 실전(失傳)되었기 때문에 한대에 들어 유학자들은 구전과 기억에 의지하여 실전된 경서들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때 구전되는 지식들을 끌어 모아
會向卒, 哀帝復使向子侍中奉車都尉歆卒父業.”
아울러 宣帝 甘露 연간에 五經의 같고다름[同異]에 대한 비교 및 논의를 石渠閣에서 개최 上同 “甘露中與五經諸儒雜論同異於石渠閣.”
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 논의는 초기 經學史에 있어서 중요한 쟁점이 될 今古文論爭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
經學)이다. 경학은 경전의 간단한 말 속에 담긴 큰 의미를 밝혀내려는 학문적 작업이다. 그러나 이는 순수한 학문적 욕구에서가 아닌 통치자의 현실적 욕구에 부흥하기 위함이었고, 이에 신구 경학자 간에 갈등이 생겨 상호 배척하게 되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경학은 ‘천인삼책(天人三策)에서
經學)"과 대비하여 어린이들에게 언어와 문자를 학습하기 위해 가르치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의 발전으로 이를 배우고 가르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소학이 흥기하게 되었다. 예전 주(周)나라 때 소학은 원래 육예(六藝)와 육의(六儀)를 말한 것이고 후에 점점 축소되어 육예 중에 서(書)만을 가리키게